[아무튼, 주말] "난 장작이었지" 인터뷰 내내 그녀는 울음같은 웃음을 토해냈다

[김미리 기자의 1미리] 엄앵란, 신성일 떠나보낸 후 첫 인터뷰

"다들 나같이 억세게 살아오잖아… 순두부 같은 여자가 어딨겠어"

“싱싱아, 엄마·아빠랑 같이 사진 찍자.” 이대원 화백의 그림이 걸린 거실에서 엄앵란이 신성일이 떠나기 2주 전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을 들어 보였다. 10년 같이 살며 외로움 달래 준 강아지 ‘싱싱이’의 표정이 엄앵란과 묘하게 닮았다. 작은 흑백 사진은 신성일의 마포 집에 걸려 있던 결혼 사진. 부부의 시작과 마지막을 보여주는 사진이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싱싱아, 엄마·아빠랑 같이 사진 찍자.” 이대원 화백의 그림이 걸린 거실에서 엄앵란이 신성일이 떠나기 2주 전 함께 찍은 마지막 사진을 들어 보였다. 10년 같이 살며 외로움 달래 준 강아지 ‘싱싱이’의 표정이 엄앵란과 묘하게 닮았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그이 세상 뜨기 2주 전 나랑 찍은 마지막 사진이야. 이렇게 팔팔했는데 어찌 그리 빨리 가누…." 지팡이를 짚은 엄앵란(83)이 거실 장식장에서 사진을 꺼내며 말했다. 지난해 10월 말 남편 신성일(데뷔 전 본명 강신영)이 암 투병할 때 머물던 전남 화순 비오메드요양병원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환자복 입은 건 엄앵란이었다. 3년 전 무릎 수술받은 게 안 좋아 잠시 내려가 같은 병원에서 요양할 때였다.

이 사진 맞은편에 1964년 두 사람의 결혼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마포 만리동고개에 있는 아버지 서울 집에 가서 유품 정리하다가 침실에서 발견했어요. 아버지가 결혼사진을 걸어두셨다는 건 아무도 몰랐어요." 엄앵란과 함께 살며 매니저 역할을 하는 막내딸 강수화(49)씨가 말했다.

부부의 시작을 담은 결혼사진과 마지막을 기록한 요양병원 사진. 두 사진 사이에 애증과 회한의 54년이 있다. 그 세월을 듣기 위해 지난 8일 배우 엄앵란을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만났다. 지난해 11월 4일 신성일을 떠나보낸 후 첫 언론 인터뷰다. 수차례 인터뷰 요청에도 "가스불 끌 정신도 없어" 하며 거절했던 그녀가 해가 바뀌고 전화를 걸어왔다. 엄앵란은 처음 본 기자에게도 오래 알고 지내온 사람처럼 격의 없이 말했다. "이때까지는 신성일 그늘에서 꼼짝 못했는데 이젠 무슨 말을 하건 야단칠 사람도 없다"며 훌훌 털어냈다.

―신 선생님 가신 지 두 달 반쯤 지났습니다.

"그이 인생은 정말 모노드라마(일인극)야. 남이 안 하는 거를 혼자 다 해보고 살았어. 배우 노릇 했다가 국회의원 했다가 감옥 갔다가 영화 제작도 했지. 거기다 연애 박사까지. 후회 없이 다 하고 갔잖아."

―오래 따로 지내셨죠. 그래도 사별은 다른 차원이지요?

"영 이상해. 떨어져 있을 때는 뭐가 되어도 내 서방이 저기 있다, 자기 좋은 대로 다 하게 놔두자, 이런 맘이었어. 영화 촬영하느라 우리는 청춘을 완전히 버렸어. 데이트한 거는 촬영장에서 웃고 얘기하고, 경치 좋은 데 가서 촬영한 거밖에 없었어."

―그런데 반할 틈이 있으셨나요.

"'로맨스 빠빠'(1960년)에서 처음 만났는데 나는 중견이고 걔(신성일이 한 살 연하)는 첫 촬영이었어. 감히 나한테 말도 못 붙였어. '미스터 신'이라 불렀지. '동백아가씨' 촬영 때였나, '미스터 신, 졸려 죽겠어' 그랬더니 한강 모래밭에 오토바이 끌고 오는 장면에서 그냥 자빠지는 거야. 적십자 병원에 입원해서 이튿날 병문안 갔더니 링거 꽂고 나한테 윙크 날리더라고. 잔꾀를 낸 거지. 촬영 펑크 내서 나 쉬게 해주려고. 왕자답더라, 남자답더라. 그런데 결혼해 보니까 너무 남자야. 참 나, 무를 수도 없고."

―언제 너무 남자인 걸 아셨나요.

"결혼 전부터 알았지. 결혼한 뒤로도 영화가 좀 뜸하니 여자들이 가만두지를 않고 유혹해. 밤 12시 넘어 자기 남편 죽은 지 49일도 안 돼 전화 거는 부잣집 며느리도 있었어."

―여성 편력은 익히 알려졌지만, 2011년 신 선생님이 자서전에서 옛 애인이었던 동아방송 아나운서 김영애씨와의 외도를 공개적으로 밝혔을 땐 다들 공분했죠.

"난 자서전 안 봤어. 나 보고는 '여자가 밖에서 헬렐레해 보이면 안 된다'며 찍소리도 못하게 해놓고선 자기는 왜 밖에서 헬렐레한 여자들하고 그렇게 놀아 재꼈는지. 그래도 '나는 이혼 안 한다' 했어. 남편 기를 또 살려준 거지. 이 바보가. 난 여태 탈 쓰고 살았어, 탈."

―'엄앵란은 보살'이라면서 감정이입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영화 제작한다고 난리, 극장 짓는다고 난리, 정치한다고 난리…. 태평극장 사서는 나더러 표 받으라고 해서 매표소에서 표까지 팔았어. 나는 배우가 아니고 걸레였어. 물 엎지르면 물 훔치고 때 타면 때 닦는 걸레. 잘못 써서 섹시한 걸레로 쓰지 말고. 으하하하." 엄앵란이 허공을 보며 웃었다. 목울대를 타고 넘어온 퍽퍽한 웃음이 울음과 묘한 경계에 서 있었다. 인터뷰 내내 그는 울음 같은 웃음을 쏟아냈다.

신성일 엄앵란
신성일의 마포 집에 걸려 있던 결혼 사진. 막내딸이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

―1956년 '단종애사'로 데뷔해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됐습니다. 유혹이 있었을 법한데요.

"'미스 엄, 저녁 먹자' 하는 사람 많았지. 그런데 절대 안 갔어. 중앙정보부에서 오라고 해도 우리 엄마가 배앓이하고 있다면서 다 막아줬어. 여자 연예인들을 다방 마담으로 보고 남자들이 종아리부터 훑어보는 게 정말 너무 싫었어. 내가 연예인 값어치를 올리겠다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대학(숙명여대 가정학과)을 졸업했어. 내가 여자 연예인 1호 대학 졸업자야."

―결혼 생활이 원만하지 못해 친정 부모님이 속상해하셨겠어요.

"우리 아버지(색소폰 연주자 엄재근), 어머니(배우 노재신)가 결혼할 때 반대하셨어. 내용 없다고. 사실 부모님 때문에 이혼을 안 한 것도 있었어. 부모님이 예능인이신데 '딴따라 자식이라 이혼할 줄 알았어' 이런 얘기 절대로 듣게 하고 싶지 않았어."

―결혼하고는 일을 접었습니다. 후회는 없었나요.

"애 셋(1남 2녀) 낳고 국민학교 다닐 때까지 살림만 했어. 푹 썩었지. 의리 때문에 마지못해 1968년 '아네모네 마담'에 출연한 적은 있었어."

가을에 마당에서 고추 말리고 있는데 '맨발의 청춘'을 만들었던 제작자가 찾아와 사정했다. "앵란아 한 번만 살려줘. 시나리오 나왔는데 네가 나와야 아카데미 극장도 내준단다." 애 낳고 74㎏ 나갈 때였다. "뚱땡이라 안 돼요." "괜찮아. 다방 마담 역이야. 한복 입고 카운터 앉아 있으면 돼." 영화 찍고 신성일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경아(큰딸) 아버지가 날씬하지도 않으면서 왜 나갔느냐고 한바탕 야단이 났어. 대들지도 못하고 그저 참기만 했어."

―남편한테 꼼짝 못하셨나 봅니다.

"아이고, 말을 마. 무슨 여자가 그리 말이 많냐면서 모임 가면 자기 뒤에 가만히 쫓아다니래. 하도 약이 올라서 그이 혁대에 손가락 쿡 찔러 넣고 꽉 붙잡고 따라다녔어."

―두 분 참 다르셨나 봅니다.

"완전히 달랐지. 여자 문제로 싸운 적은 없는데 건강관리, 식습관이 하도 달라 허구한 날 싸웠지. '집 앞 한강 가서 좀 뛰어, 이렇게 좋은 데를 놔두고 왜 집에만 앉아 있느냐' '쌀밥 먹지 말고 잡곡밥 좀 먹어라'…. 그놈의 잔소리. 그이가 볼 때 나는 그냥 시궁창이었지. 아무 거나 먹고 몸 관리 안 했으니. 그런데 그렇게 건강 따지던 이가 먼저 갔어."

―무조건 참는 게 옳은 선택이었을까요? 기성 세대는 선생님의 삶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참는 게 진정한 행복인가 되묻습니다.

“각자 다르지. 살아보니 참아서 좋은 게 있고, 안 참아서 좋은 것도 있어. 울고불고 자식들 서로 나눠 가지는 건 비극이야. 그걸 이겨낼 자신 있고 단란한 가정 다시 만들 자신 있으면 하면 되지.”

―‘엄앵란’이 아니었으면 남편과 헤어지셨나요?

“백번 헤어졌지.”

―선생님은 참고 사셨지만 막내딸은 이혼하셨던데요.

“어느 날 보따리 싸고 와서 이제 안 간다고 하더라. 한마디 안 했지만 속으로 ‘나는 못 했지만 너라도 해라’고 했어.”

―그때 신 선생님 반응이 궁금합니다.

“‘잘 왔다’ 한마디 하더라고.”

―끝까지 이혼 안 하신 것 두고 ‘가장 확실한 복수’라는 댓글이 달렸더군요.

“(박장대소하며) 맞아. 어느 년 좋으라고 이혼해.” 5년 전쯤 가족회의를 했다. 자식 셋과 여동생이 왔다. 모두 이혼하라 했지만 엄앵란을 설득하지 못했다.

―외롭지 않으셨나요.

“우리 ‘싱싱이’ 있잖아. 10년 전 배우 이경영이 준 유기견이야. 싱싱하게 살라고 ‘싱싱이’라 이름 지었지. 얘가 남편보다 나아. 내가 넘어지려고 하면 부리나케 달려와. 개새끼도 이러는데 신성일이는 내가 아프다고 하면 ‘빨리 병원이나 가지 뭐해’ 틱 내뱉기나 했지.”

―남편 요양할 때 자주 보셨어요?

“죽을 때가 너무 걸작이야. 그리 온갖 계집 만나며 밖으로 나돌더니 늘그막엔 왜 그리 찾던지 자꾸 오라더라고. 나는 다리 절뚝거리는 모습으로 화순까지 나다니는 게 싫었는데 말이야.”

엄앵란은 수시로 허공을 응시하며 울음 같은 웃음을 쏟아냈다. 원망과 애증, 회한을 토해내는 듯했다.
엄앵란은 수시로 허공을 응시하며 울음 같은 웃음을 쏟아냈다. 원망과 애증, 회한을 토해내는 듯했다./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임종을 못 봐서 안타까우셨겠어요.

“석현(아들)이가 아버지 상태가 심각하다 해서 급히 기차 타고 내려가는데 창밖 산천초목을 보니까 그 사이 희로애락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거야. 문득 ‘나는 신성일에게 잘한 게 뭐 있나, 내가 부족하니 밖으로 돌지 않았겠나’ 싶더라고. 그 죄를 어떻게 씻을까 하다가 발이라도 씻겨 줘야겠다 싶은 거야. 세상 뜨기 사흘 전 발을 씻어 줬어. 그게 마지막으로 본 거였어.”

―마지막 말씀이 ‘수고했고 고맙다’였다고요.

“석현이 귀에 대고 ‘엄마한테 수고했고 고마웠다고 전해줘’ 했대. 찡하더라. 보통 때는 주절주절 그렇게 말 많이 하는 양반이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딱 두 마디입니다. 야속하지 않았나요.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사랑해’ 아니었는지요.

“으하하하.” 예의 그 웃음을 허공에 던지고 대답을 주저하자 수화씨가 말했다. “엄마, 실은 돌아가시기 전에 아빠가 전화해서 ‘너 나 사랑하냐?’ 물었어. 그래서 ‘아빠 뼛속까지 사랑해요’ 답했더니 ‘나는 너를 열정적으로 사랑한다’ 그러셨어.” 엄앵란이 말했다. “아니 그걸 나한테는 안 하고 왜 거기다 했대. 그 사람은 그렇게 말을 아껴. 나한테만. 밖에선 다 퍼주면서.”

―그래도 유방암 수술하셨을 때 신 선생님이 극진히 돌봐주셨다고요.

“수술 후에 휠체어 밀고 다니고, 진찰할 때 일일이 쫓아다녔어. 보호자 노릇 제대로 했지. 사람들이 참 보기 좋아하더라.”

―장례식장에서 “저승에선 그저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시라”고 말해 화제가 됐습니다. ‘순두부 같은 여자’란 어떤 여자를 말하는 건가요.

“순수하고 차분하고 말 없고 남자가 하자는 대로 순종하고 순두부같이 뽀얗고 예쁜 여자. 나같이 억세지 않은 여자.”

―선생님은 그럼 어떤 여자인가요.

“나는 장작 같은 여자지. 다 태우고 헌신하는 여자. 군불 지피라면 몸 태워 불 피우고, 가마솥 데워 누룽지도 끓이고 메주도 쑤는 장작. 그런데 사실 다 그렇게 하고 사는 거야. 말이 그렇지 순두부 같은 여자, 순두부 같은 남자가 어디 있겠어.”

―다음 생에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으세요.

“어우 야, 난 남자는 진절머리 나.”

―신 선생님이 유산은 남기셨나요.

“유산은 없고 유품만 있지. 마지막까지 목에 걸치고 있던 실크 스카프하고 실내화. 그이 체취 느끼고 싶어 옆에 뒀어. ‘신성일이 대신 너다, 신성일은 안 죽었다’ 이러면서.” 옆에서 수화씨가 기억을 더했다. “엄마 까르띠에 시계 하나도 남기셨잖아.” “얘, 그게 무슨 유품이야. 그거 내가 파리에서 사다준 거야. 사줬더니 차지도 않고.”

딸에게 물었다. 신성일은 어떤 아빠였을까. “‘바짓바람’이 엄청났어요. 아버지가 교무실을 제 집 드나들듯 하셨죠. 엄마한텐 엄했는데 저한테는 정말 자상했어요. 대학 들어갔다고 신용카드 만들어 척 주시고. 그런데 돈은 엄마 통장에서 빠져나갔어요(웃음).” 엄앵란이 가슴 친다. “내가 그러니까 장작이야. 내 몸 태워서 가족 먹여 살리고. 폼은 남편이 다 잡고. 난 결국 죽은 남편 스카프 하나 붙잡고 살고.”

신성일이 마지막까지 썼던 스카프와 실내화. 남편 체취를 느끼고 싶어 엄앵란이 간직한 신성일의 유품이다.
신성일이 마지막까지 썼던 스카프와 실내화. 남편 체취를 느끼고 싶어 엄앵란이 간직한 신성일의 유품이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전혀 안 주셨나 봅니다.

“1970년대는 잘 벌었지. 그다음엔 내 말 안 듣더니 하는 것마다 다 망했어. 국회의원 되고 월급 받을 때도 신문 값 한 푼도 안 줬어. 신문 보는 인간은 자기면서.”

―그렇게 밉다 하시면서 추도식에서 신 선생님 묻히신 경북 영천 성일가(신성일이 살던 한옥)에 나란히 묻히겠다 하셨어요.

“생전에 같이 영천에 묻히자고 할 땐 ‘내가 왜 당신하고 같이 묻히느냐. 나는 화장해서 맷돌로 확 갈아서 한강에 뿌려 달라’고 했어. 그런데 장례식 때 신성일·엄앵란은 대중 때문에 먹고살았던 걸 다시 실감했어. 내 마음대로 따로 묻히겠다는 것도 대중을 배신하는 거다 싶어 옆자리로 묫자리 정해놓고 왔어. 나도 이제 얼마 못 살 거야.”

―몇 점짜리 아내였다고 생각하시나요.

“껌값.” 딸이 발끈한다. “엄마 100점 만점에 120점이지 무슨 말이야. 울 엄마, 엄앵란이라는 이름 석 자 걸고 흠 하나 안 잡히려고 아등바등 살았어요. 반세기 넘게 버텼어. 진짜 멋지다, 우리 엄마.” 딸의 칭찬이 무안한지 엄앵란이 고개 돌리며 말한다. “지랄한다.”

―‘동지’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어려서 가난했고, 합심해서 영화배우로 톱까지 갔어. 그런데 결혼하고 보니 동지도 아니고 개뿔도 아니었어. 그냥 이기주의자였어.”

―신 선생님이 10년 전쯤 인터뷰 때 ‘엄앵란이가 순발력 발휘하는 건 변화무쌍한 남편과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 적이 있더라고요.

“어이쿠, 놀고 자빠졌네. 하도 사고를 치니까 그런 거지. 싸지른 사고 무마하려고 임기응변이 생겼을 수는 있었겠다.”

―두 분이 어떻게 기억됐으면 하세요.

“막살지 않은 부부. 같이 열심히 일하고 끝까지 이혼 안 하고 자식 잘 키우다 행복하게 죽었다고 기억됐으면 좋겠어. 그거 바라고 내가 이렇게 살았어.”

―남편 가는 마지막 모습 보실 때 심정이 어떠셨나요.

“염할 때 보니 참 곱고 깨끗하더라. 그런데 장의사가 분을 발라주는데 화장 솔이 너무 시커먼 거야. 이 송장 저 송장 얼마나 발랐으면 저리 시커메졌을까. 톱스타 신성일 가는데 내가 알았으면 새 거 사줬을 텐데. 마음이 내내 아프더라.”

걸걸한 웃음과 유머로 세 시간 넘게 대화를 이끌던 엄앵란의 목소리에 먹구름이 끼었다. “나더러 왜 눈물 안 흘리느냐고들 해. 부러 안 흘리는 거야. 내 가슴 한가득 눈물바다가 있어. 며칠 전 라디오에서 김정호 노래 ‘하얀 나비’가 흘러나오는데 구구절절 내 마음이더라고.” 휴대전화로 노래를 틀어 함께 들었다.

“음~ 생각을 말아요 지나간 일들/ 음~ 그리워 말아요 떠나갈 님인데/…/음~ 어디로 갔을까 길 잃은 나그네/음~ 어디로 갈까요 님 찾는 하얀 나비/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

따라 부르던 엄앵란이 고개를 젖혀 천장을 봤다. 임 찾는 하얀 나비가 거기 있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18/2019011801414.html